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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곳에 (이준익,2008)] 인간을 사랑하는 감독의 이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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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나는 사실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 많이 알면 영화가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게으른 천성은 나를 그런 지식의 즐거움으로 늘 이끌지는 못한다. 그래서 전에도 다른 자리에서나 글에서도 밝힌 바처럼 관객을 약간은 '괴롭게 하는' 영화와 감독들을 좋아한다. 영화를 보고 났는데 그리 내 삶이나 내 머릿속 생각들에 미세한 진동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사라져 가는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영화를 보며 조그맣게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나름 무지 애를 쓰는 편이다.


2005년 12월 마지막 주에 본 '왕의남자'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조건을 갖춘 영화였다. 역사 속에서 소외되었던 천민집단에 속했던 '광대'들을 무대의 중앙으로 이끌어 내고, '폭군'이라 불리우고 평가를 받는 '연산군'을 한쪽 가슴이 찢겨진 상처를 입은 슬픈 인간으로 그려낸 감독 '이준익'의 '왕의남자'는 해를 넘겨 그 다음달 그리고 그 다음달인 2006년 2월까지 스물다섯번 이상을 보게 만들었다. 이것 저것 영화를 보러 다니며 모은 것들 중에 가장 아끼는 것도 '왕의남자' 의 네 주인공이 나오는 필름컷들이다(장생, 공길, 연산, 녹수). 이런 나의 생각은 어제 '님은 먼곳에'를 보고 난 뒤 '이준익' 감독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2006년에 '왕의남자'를 보고 난 뒤에 쓴 글을 보자.

애닯다 그 슬픈 심장이여!
조각난 마음의 티끌이 온 마음을 휘젓는다
씻으면 좋을 것을 그리하지도 못하는구나
어리석음이 그 위에 덮여 세상을 보지 못하는구나
슬픈 그 영혼 안식하지 못하고
피로써 그 화해를 하려하나
또 다른 슬픈 이만 늘어난다
슬픈 연산!
그대를 수 없는 사람들이 비난했다
그리도 아픈 그대를

연산에 대한 애닯은 나의 마음을 적어 두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준익'은 인간에 대해 긍정적이며 '악인'과 '선인'으로 명확히 나누어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보아 왔던 그의 영화 속 마지막 장면들을 기억해 보자. '왕의남자'에서는 죽음을 앞둔 장생과 공길이 하늘로 날아 올라 '순간'이기는 하지만 '영원'한 자유를 맛보며 막을 내리고 그들의 꿈을 찾아 떠나는 장면으로 맺음을 한다. '라디오스타'에서 퇴물 락커 '최곤'과 그의 매니저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으로 비를 맞으며 그 운명같은 인연을 계속 이어간다. '즐거운인생'에서는 하나같이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인 주인공들이 성공을 담보받을 수 없는 '마지막콘서트'를 불사르고 자신들이 여전히 '의미'있는 인간이며 살아갈 충분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 주며 막을 내린다. '황산벌'에서도 감독은 역사를 승리한 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또한 권력자의 눈을 배제하고 구석구석에서 숨을 쉬었던 작은 자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왕의남자'를 본 뒤에 적은 글을 하나 더 본다.

가죽 - 껍데기

'광대는 그저 광대일뿐'
'광대가 천한 상놈이면 어떻고 정승이면 뭐해 ...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인 것을'

나는 늘 허위의식에 둘러쌓여
내가 가져야 할 것과 내가 가진 것 사이에
늘 괴리가 생긴다

가죽을 뒤집어 쓰고 다른 사람인양 행세하고
껍데기 남지 않은 허울에 우울해 한다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 될런지?
그래서 내 삶은 서서히 부스러져 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멀스멀 그렇게

'님은 먼곳에'를 보며 생각한 두번째는 '세상은 우리를 광대라 한다, 세상을 우리를 광대라 부른다' 하는 것이었다. 국가라는, 사회라는, 조직이라는 곳에서 한 개인이 느껴야 하는 존엄과 가치는 늘 존중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순서요 질서일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누군가를 멸시하며 누군가를 매장을 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런 면에서 미개한 나라이며 후진적인 사회이다. '영화'를 조금 좋아하게 되고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보게 되면서 느끼는 마음은 나와 우리 속에 존재하는 '악마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또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색깔을 끼고 바라보는 시각을 느끼면 이내 그것은 공포로 바뀐다. 그저 먹고 마시고 배부르고 그것에 하나 덧붙여 내 생각을 자유로이 말하는 자유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붉고 검은 색'으로 아름답게 칠을 해 준다. 영원한 굴레와 함께 말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다음 글을 통해서도 알수 있을 것이다.

갇힘의 굴레

무엇인가라는 것과 누구라는 것에
갇혀 버리기 시작하면

자신은 없어지고 오직 역할이 남는
우리는 포로 신세

왜와 어떻게 라는 의문에 답하지 못하면
그건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한 축일 뿐,

언제나 우린 그 자리에 있지만
다른 쪽을 바라보고 싶다

감독의 관심은 바로 자유로운 '인간'에 닿아있다. 나쁜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으로 만들어진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은 타인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공존을 할 마음의 틀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억압과 질시 그리고 상처를 받은 영혼은 자신과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해야만 그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감독의 생각은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보다 '원래의 인간'형으로 바뀌어지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왕의남자'에서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려야 했던 장생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러하고. '라디오스타'에서 세상에 의미없는 퇴물 가수로 막을 내려야 했던 '최곤'이 여러 사람의 도움과 수 많은 팬들의 응원으로 자신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아니 처음으로 발견하는 기쁨을 맞보게 된다. '님은 먼곳에'의 '정만(정진영)'과 '상길(엄태웅)'은 마초이며 여자에 대한 폭력성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소극적으로 드러내며 살아온 남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써니(순이,수애)'와 만남으로 인해 자신들이 상처입고 그 상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끊임없이 주었던 인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나는 그런 치유의 인간상을 그려내는 감독 '이준익'이 그래서 좋다.

한 판 굿거리

이제 세상에 굿판이 벌어진다
누구나 그 축제의 주인이 되어 보자

그저 한 마당 놀다 가면 그 뿐이다
푸른 빛, 붉은 빛, 서로 어울려 있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로 일어서자

누구라서 아니되고 누구라서 싫다하지 말고
서로 얽혀 새로운 한판 굿을 펼쳐보자

'이준익'의 영화에는 유희가 있고 놀이가 있으며 또한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유머가 있다. 남편을 만나러 월남으로 간다? 일단 이건 미친 짓이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것이다. 남편을 찾아 떠난 그 곳에서 '써니'는 그를 만나야 겠다는 강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공연이라는 어쩔수 없이 주어진 상황은 그녀를 노래하도록 강제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색했던 노래(어색하다기 보다는 사실 그녀의 원래 노래가 아니었다)가 차츰 자연스러워지며 자신도 즐기고 다른 이들(병사들)을 즐겁게 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노랫말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속에서 그녀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 즐거움을 준다. '왕의남자'의 장생,공길을 비롯한 광대들이 그러했으며, '라디오스타'의 최곤이 그러했고 또한 '즐거운인생'의 늙은 청춘들이 그러했다.

장생, 공길, 연산 그리고 녹수

한 판 놀이가 마칠 때마다
분노의 칼이 누군가의 목을 죄어간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각자 약한 다리 절룩절룩
떨리는 입으로 한 마디씩

나는 슬픈 영혼, 그래서 그걸 풀러 왔노라고
그래 이제 놀이는 끝나고
그들은 과거의 공간 속으로 흩어진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모난 돌로 찍어대지만

'우리 한번 맞춰 보자'
'이 놈의 징헌 세상 질펀하게 한 판 놀아 보면 그만인 것을'
'아들아, 아들아! 다행히 네 목숨 부지하거든 황제가 행차하시는 길 옆에 나를 묻어다오'

포탄이 날아다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순이'와 '상길'은 마주한다. 면회를 왔던 '순이'를 어느 여관방에서 차갑게 외면했던 '상길'이 다시 마주한 것이다. 그들의 재회는 이전의 냉랭한 것이 아니었다. 뜨거웠으며 눈물이 있었고 가슴 속에서 자라 나지도 못했던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회개하고 기도하는 '남자'와 그런 연약하고 비천한 한 '남자'를 끌어안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끄는 '여인'으로 그려지고 영화는 그 끝맺음을 장식한다.

감독 '이준익'은 그림을 그려내는 시인이며 음악가이다. 모자를 벗으면 빛나는 그의 머리 속에 어떠한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아주 조금은 알게 된 거 같은 지금의 이 느낌은 그래서 그의 영화를 사랑하고 아껴왔던 나에겐 매우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보여 지기를 바란다.

바람 - 그 욕망에 사로잡힌 나, 인간

가고 가도 끝이 없는 길이 있다면 누구도 가지 않을 터인데
인간은 무심히도 그 길에 끝없이 늘어 선 개미떼
만족하지 말라는 계명에 충실한 시장만능주의
더 채워라 그리하면 더 만족하리니
이십세기 그리고 이십일세기의 최대종교는
기독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아니다
자본의 힘이 인간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다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즐거운 고통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여기까지 읽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감독께서 얘기한 것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나는 반쯤은 성공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자유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영화관람평들을 기대하며 이만 줄인다.

written by  느림보(knuepck)님 (네이버 영화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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