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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꿈의 공장, 이준익 감독


이준익 감독의 음악 영화 삼부작 세번째 편 <님은 먼곳에>를 봤습니다. 이준익 감독에 대한 소개는 여전히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지요. 이번 <님은 먼곳에>도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 많은 관객들의 뇌리 속에 인장을 새겨둔 작품이니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이후 2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음에도 아직까지는 2005년도 영화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라디오 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 이 그렇게 형편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관객 동원에서는 <왕의 남자>에 비할 바가 못되긴 했지만 해마다 꼬박꼬박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적당히 대중적이고 또 적당히 메시지도 담겨 있는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온 이준익 감독이야 말로 생산성 높은 한국형 꿈의 공장이라 부른다 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이준익 감독의 높은 생산성은 그다지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외형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손색이 없는 준수한 작품들을 해마다 쑥쑥 뽑아내는 성과로 나타나고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이상의 성취를 목표로 작업하지는 않는다는 아쉬움을 남기곤 했습니다. 물론 100억 이상의 제작비를 쓰며 자아도취적인 작품을 남기고 마는 경우들에 비하면 훨씬 실속있는 행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준익 감독이라면 누가 보아도 현재까지 보여준 그 이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왠지 태업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나는 결코 무리하고 싶지 않다, 만들 때 즐거운 만큼만 하고 싶다, 이게 그리 쉬워 보이냐 네가 한번 해봐라 등등 많은 변명과 양해가 가능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영화 팬으로서 갖게 되는 이준익 감독에 대한 욕심과 기대는 적당히 만족할 줄을 모르니 이것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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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차게 만든 전쟁 블럭버스터

<님은 먼곳에>는 70억원의 제작비, 그 가운데 태국 로케이션 비용만 30억원이 들어간 영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준익 감독은 남들이 200억에 가까운 돈을 들여가며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을 때 왠만한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 수준의 비용으로 전쟁 블럭버스터 한 편을 알차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님은 먼곳에>에서 전쟁은 배경일 뿐 그 자체가 중심이 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님은 먼곳에>에서 보여주는 그림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국내외 전쟁 영화들과 비교하더라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엄태웅)을 찾기 위해 가수가 되어 떠난 여인(수애)의 이야기니까 전투 장면은 적당히 묘사되거나 아예 안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봤는데, 아이고 맙소사 그걸 어떻게 다 찍으셨는지 저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네, <님은 먼곳에>는 전쟁터의 주변을 적당히 돌다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중심으로 있는 힘껏 뛰어드는 영화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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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또는 대한민국의 과거사

<님은 먼곳에>가 전쟁터로 뛰어들 때 손에 든 것은 물론 총이 아니라 음악입니다. 미국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팝송을 불러야 하는데 수애가 팝송을 잘 못하기 때문에 파월 한국군들을 상대로 하게 된다는 설정은 영화에 사용될 외국곡들에 대한 비싼 저작권료도 피하고 동시에 훨씬 다이나믹한 공연 장면들을 선보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미군 부대에서의 첫 공연에서 욕만 얻어먹은 이후 한국군 앞에서의 공연이 저절로 되어가다시피 하는 모습을 볼 때에는 이역만리에서의 진한 동포애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리하여 <님은 먼곳에>에서 관객들이 접하게 되는 곡들은 대부분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한국 가요들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60년생이고 최석환 작가는 그 보다 젊으니까 자신들의 추억만으로 선곡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노래들은 <라디오 스타>에서 '비와 당신'이 상징했던 과거의 영광이나 추억담도 아니오 <즐거운 인생>에서 '불놀이야'와 같이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찾는 희망의 노래들도 아닙니다.

<님은 먼곳에>에서 사용된 음악들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곡의 내용은 연애 감정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 노래가 만들어지고 또 한창 불리워진 그 시절의 대한민국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언급되듯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일행 역시 미군들을 위해 노래하고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의 전쟁터로 향합니다. 물론 주인공 순이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미군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순이의 행동과 일행들이 느끼는 공분은 결국 당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과거사이고 그에 대한 공분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남편을 만난 순이가 얻은 것 역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남편과의 애정이나 자기 의무의 달성이 아니라 그 시대를 참고 살아야 했던 자로서의 분노의 표출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겨냥한 기쁨이나 슬픔이 아닌, 가슴 한켠을 찌르는 아픔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울러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 때와 어느 정도나 달라져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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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완성 보다는 이야기의 가치

개인적으로 <즐거운 인생>을 보고 가졌던 이준익 감독 작품들에 대한 불만이 <님은 먼곳에>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님은 먼곳에>는 이준익 감독의 음악 3부작의 마지막 지점인 동시에 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서 다뤄주었으면 했던 지점에 훨씬 가깝게 다가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준익 감독에게서 영화 예술의 형식적인 진일보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한국영화가 정말 다뤄줘야 할 내용들을 기대합니다. <님은 먼곳에>에서도 내러티브 상 약간의 우격다짐이 보이기는 합니다. 베트콩에게 붙들려 지하에서 막노동을 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은 좀 의아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미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베트콩의 인간미를 부각시킨 설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벌러 자기 나라에 들어온 한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렇게 쉽게 해소될 수 있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순이가 미군 부대장의 방에 홀로 남는 장면에서 밴드 멤버들이 애써 벌어 모은 달러를 전부 불태우는 장면도 좀 오바였고 굳이 최종 버전에 남겨둘 필요가 없었던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굳이 저렇게까지?' 하게 되는 장면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대중 영화로서 설명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들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님은 먼곳에>와 같은 이야기를 다뤄준다면 저로서는 이런 정도를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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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는 정말 좋은 배우입니다. 얼굴 이쁘고 그림이 잘 잡히고 연기까지 잘 해내는 배우들이 그리 많지 않은 판에 수애는 그 뿐만 아니라 자기 가슴 속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이밀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혼원정기>(2005)가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와 같은 수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님은 먼곳에>는 보기 드문 배우의 재능을 십분 활용하며 작품과 배우, 관객 모두가 윈윈하는 정말 괜찮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정진영의 악스러운 연기는 걱정했던 것에 비해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정진영의 연기 스타일은 70 ~ 80년대나 그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경호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아 조금 아쉬웠고 엄태웅은 '특별출연 한번 거창하게 했다'는 소리가 나올만 하더군요. 혹시 이준익 감독의 다음 영화에 엄태웅이 주연을 맡기로 내정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주진모씨도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던 모습에 비해서는 그리 빛이 나진 않더군요. 하지만 기타를 어깨에 매고 그냥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신중현씨의 그림자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어지 (영화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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